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4: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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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8-27 |
수요설교250827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본문: 갈4:12-20
제목: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I. 서론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처음에는 감격과 감사가 넘쳤는데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얻는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듣고 그리로 휩쓸려가는 상황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감성에 호소하며 속히 원래의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이 남들보다 더 잘 한다거나, 더 잘낫다는 칭찬을 듣기 원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갈구하는 우리의 맹목적인 갈망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교만에 영합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의 거짓 교훈을 심기 위한 발판을 회심한 갈라디아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찾았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칭찬과 교만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율법을 제공하며 믿음에서 행함으로 더 나가야 하나님께 칭찬듣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만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어떻게 복음으로 설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처음에 받았던 복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들이 처음에 받았던 복음이야말로 가장 좋은 소식이며, 유대주의자들을 따르기 위해 그것을 결코 버리면 안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본문 12-16절에서 처음에 전한 복음을 상기시킵니다.
본문 12절에 “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불신자와 초신자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고전 9:19-23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했습니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그들을 섬기는 종처럼 대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과 같은 모양으로 생활하고 그들을 섬겼으니 갈라디아 성도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고전11:1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자기와 같이 되라고 한 것은 예수님처럼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섬기는 종과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갈라디어 성도들이 바울 사도가 희생적으로 봉사하며 교훈했을 때 그것을 알아주고 용납하고 존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13-1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13-14절에 “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13,14장의 내용을 참고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아 간 곳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섬입니다. 거기서 바예수라는 마술사가 복음전하는 것을 방해하자 그가 맹인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서기오 바울이란 총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섬에서 벗어나 소아시아 밤빌리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밤빌리아 지역은 늪지대가 많고 고온다습하여 풍토병이 많았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열대성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말라리아에 걸리면 심한 두통으로 간질증세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도 좋지 못했으니 눈도 더 나빠졌을 것이고 간질증세도 나타났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습한 기후를 피해 건조한 내륙 쪽으로 전도하러 갔는데 그곳이 바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그리고 갈라디아 지역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 ‘육체의 약함’이란 바로 이런 간질증세와 눈이 아픈 증세를 가지고 건조한 갈라디아 지방으로 선교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처럼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의 이러한 질병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고 “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자기 모습은 왜 저 모양이야, 자기 병이나 고치지?”라고 했다면 시험이 들어서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교하다가 간질로 발작을 일으키거나 눈이 좋지 않아 눈곱이 항상 끼어 있었다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그 약한 몸, 병든 몸을 이끌고도 저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감격하여 “우리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직접 보낸 천사같은 분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하듯이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설교자를 주님을 대하듯이 귀하게 보게 됩니다.
본문 15절에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중언하노니 너희가 할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 안에 있을 때는 바울의 약점을 조금도 업신여기지 않고 그 약점을 보충해 주고 싶어 했습니다. 눈이 나쁜 바울에게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은 진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고 나니 너무 너무 감사해서 바울사도를 천사같이, 예수님 같이 대접하고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바울의 약점을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처럼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무릅쓰고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성도들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한편, 그 말씀을 받는 성도들도 목회자의 육신적인 조건을 보지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의 보화를 찾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기 위하여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며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너희의 복이 어디 있느냐’는 것은 그렇게 복된 믿음으로 귀한 봉사를 했는데, 지금은 율법주의에 빠져 섬기는 자리에서 떠났으니 속히 그 복을 다시 찾으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자기자랑과 공로주의가 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드러내야 하므로 섬기려고 하지 않고, 섬기는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자기 공로를 계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이만큼 축복을 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계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가장 귀한 영원한 생명을 그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생명보다 못한 것은 다 그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받은바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봉사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6: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바르게 섬기면 의식주 문제는 주님께서 다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메시지
본문 16절에 “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라고 했습니다. 즉, 갈라디어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그렇게 돕고 봉사했는데,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떠나 율법주의로 흘러갔기 때문에 강하게 책망하니까 그들이 바울을 미워하여 원수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에게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고자 할 만큼 사랑한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너무 귀하므로 그 메시지가 계속 전해지도록 하려고 너희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제 그것보다 유대주의자들의 메시지가 정말 더 귀하고 더 타당하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들에게 처음에 들었던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웠는지 생각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복음에 현혹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주의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본문 17절에 “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에 열심을 내도록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와 성도들 사이에 이간시켜서 이단자인 자기들을 위하여 열심을 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따르고 의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최종적인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하나님께 점수를 따기 위해 할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갈6:13절에 “할례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할례를 받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고 자랑스러워 하도록 현혹한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믿음뿐만 아니라 율법이나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잘못된 메시지로 그들을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한 자아를 부추기고 칭찬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바울의 복음 메시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적이지 못한 사역자들은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자기를 향하도록 유도하는 사람일수록 열심이 대단합니다. 특히 신유은사나 방언은사를 받았거나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받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데, 끝까지 가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이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경우가 많아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방법
본문 18절에 “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잘 믿고 순종하려고 하는 좋은 일은 얼마든지 권장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 “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잘못 판단하여 그들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부모는 당연히 그들에게 다시 부모 품으로 돌아오도록 권고하듯이 바울도 그런 심정으로 지금 그들이 돌아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여자가 해산하는 그 큰 고통을 느끼면서 제발 복음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복음을 전하고 권고하고 책망하는데 온갖 고통을 다 겪어가면서 힘썼습니다.
고전 4:15절을 보면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들을 복음으로 낳았으므로 그들을 또한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나 성도들도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된 초신자들을 위해 바울처럼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은혜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지만 진리에서 떠난 자들에 대해서는 언성을 높여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바꾸어 말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다는 말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들을 직접 만나 자세한 실상을 파악한 후에 적절히 대처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2절에 “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자신이 유대인의 구별된 관행에 의존하지 않고 이방인인 그들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유대주의자들을 따르지말고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합니다.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한 것은 본문 19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속에 이루어지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 증거가 갈2:20절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나와 같이 되라’고 한 것은 “내가 죽은 것처럼 너희도 죽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서, 너희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이 너희를 빚어가게 하라”는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인격이 형성되고 그분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과 같이 수고를 다 한 후에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내적인 삶을 형성하고 다듬으실 때,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고 자만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자유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에서부터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능력을 받을 때 율법의 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때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세 구절을 연결하면 답이 명백해집니다. 19절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6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십니다. 그 다음에 4:6절과 3:5절을 연결해 봅니다. 3:5절에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사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계속 공급되고 그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온 삶의 방식을 다 버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형상을 우리 영혼 속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우리 스스로 성공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견고하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그가 지금 우리 마음 속에 행하고 계신 일,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위해 하기로 약속하신 일들이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믿고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메시지가 유대주의자들의 메시지가 서로 반대되는지 명백해집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우리의 타고난 교만, 즉 ‘스스로 성취한 사람’이 되어 영광을 독차지 하고 싶은 갈망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빚으신 사람’이 되어 날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빚어 가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교만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이룬 도덕적, 심미적, 기술적 성취에 의해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복음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처음에 예수가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고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까?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세상의 유혹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당하니 그 처음에 느꼈던 복음의 감격이 희미해지고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마지못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옛사람의 관습대로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내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고 내가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이웃을 섬기며 그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 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사도에게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 그 말씀을 믿고 확신하면서 복음 전하는 목회자에게 눈이라도 빼어주고 싶은 사랑과 헌신으로 봉사했듯이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봉사자가 되면서 교역자를 돕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초신자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로 일어날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 주님,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값주고 사셨고,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네 안에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주옵소서, 여호와의 영광을 저에게 돌리지 마시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나의 교만을 버립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소망이요 나의 생명이시니 주의 영광을 위해 나를 사용하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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