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2025-09-10 22:21:52
홍기칠
조회수   17
설교본문 갈5:1-12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9-10

수요설교 250910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본문: 5:1-12

제목: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I. 서론

갈라디어서도 교리가 먼저 제시되고 그 교리를 적용하고 실천하는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갈리디아 1장부터 512절까지는 교리부분이고 그 이후는 적용과 실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은 12절까지만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바른 신앙의 특징

바른 신앙의 특징을 본문 1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른 신앙인의 특징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뜻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나를 죄와 사망과 율법의 온갖 요구에서 자유롭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성령을 보냈습니다.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보다 더 강렬하게 원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예컨대 어린 자녀가 블록으로 바닥에 탑을 쌓거나 집을 짓거나 무슨 모양을 만들며 재미있게 놀고 난 후에 방바닥에 온통 흩어져 있는 블록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을 때 부모가 자 이제 블록을 상자에 담아야지 라고 하면 그 아이가 아빠 저 좀 도와주실래요라고 합니다. 그때 아빠는 두가지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니 너가 놀았으니 너가 다 주워서 2분안에 다 정리해, 그렇지 않으면 혼날거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투덜대며 시킨대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가지는 아빠가 물론이지 우리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지 해보자그러면 그 아이는 신이 나서 아빠와 함께 훨씬 빨리 움직이며 해야 할 일을 재미있게 하면서 끝내게 됩니다. 첫 번째 경우에 그 아이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종처럼 의무감에서 어쩔 수없이 그 일을 하지만 마음 속에는 원망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 그 아이는 자유롭습니다. 여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아빠에게 벌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종의 멍에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아빠가 도와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동일하지만 첫 번째 경우는 종의 멍에를 메고 있고, 두 번째 경우는 자유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 본문 1절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벌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돕기 위해 내려오시는가의 차이가 있는데 두 번째 것이 자유의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유를 누리게 됩니까? 첫째,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와 죄성은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모든 죄값을 갚아주시고 죄로 인한 모든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죄로 부터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둘째, 율법의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인가 업적과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율법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호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죄인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그것을 확인시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거나 자기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얻으면 우리는 자기로부터 자유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스스로 깨닫게 때문에 자신을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존재, 더 유능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자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얻으면 세상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의인으로 받으신 줄 알기 때문에 이 땅의 돈과 명예와 사람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노력해서 명예도 얻고 돈도 벌고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게 될지라도 그것을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경쟁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이러한 자유를 버리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일이 없도록 믿음으로 굳게 서야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이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마지 못해 하는 것이라면 그 멍에를 아직 메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자유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우리가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와 기도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2. 거짓 신앙에 대한 경고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유대주의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구원받으려면 믿음 뿐만 아니라 할례도 행하고 절기도 지키고, 금식도 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유혹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만일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행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2-3절의 핵심은 할례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려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고 매수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할례나 음식규례나 절기에 투자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배당금을 받은려 하면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은 그분 자신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투자하신 것에서 나오는 배당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은행에 투자하신 도덕적 자산은 너무도 커서 그 배당금이 무한하고 끝이 없는데 누가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2절은 우리가 자신의 도덕적 자산, 즉 자기 공로와 노력으로 투자하여 그것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의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는 투자할 자산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투자하신 그리스도의 투자 자체가 충분함을 깨닫고 그를 믿은 자는 누구나 값없이 의와 생명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 의와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자기가 투자하기 위해 빌린 돈을 꼭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거기에 종노릇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행위로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의 멍에를 매고 율법을 사용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한다면, 종의 멍에를 멘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안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더 이상 은혜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할 때에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은근히 퍼져 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얼마나 충분하고 완전한지 믿지 못하고 나의 열심과 공로와 조건을 더하여 구원을 이루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남들이 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것을 내가 더 해야 안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 열심히 자기도 모르게 자기 공로가 되고 자랑이 되어 마치 그래야 구원이 확실해지는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은 후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 열심은 그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지, 그 섬김이 공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자칫 자기의 열심이나 봉사나 헌신이 공로가 되고 자기 의가 되어 남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그렇지 않는 성도를 정죄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거나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신앙생활은 자유가 아니라 종의 멍에를 메는 행위인 것입니다.

 

3. 자유를 가진 신앙인의 소망

자유를 가진 신앙인의 소망을 본문 5-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분의 의로 옷입었지만 우리 앞에 놓인 최후심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질 것이며 우리는 그때에 완전히 의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성도들이 갈망하는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날의 의의 소망을 어떻게 기다리며 살아갑니까?

첫째,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며 기다립니다. 우리의 삶은 성령으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역사로 지속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 즉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와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의 삶을 기쁨의 삶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대형교회 다니는 자부심이나 중직자가 되었다는 자랑도 우리의 영적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와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표현됩니다. 성도는 말씀을 배울수록 매순간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감동과 은혜를 통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믿음을 따라 기다립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블록놀이를 한 어린 자녀의 예를 들었는데 만약 그 아이가 아빠가 도와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아빠 저 혼자서 다 치울 수 있어요, 제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께요라고 반응했다면 그 아이는 아빠의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아빠가 도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은혜보다 율법주의를, 자유보다 종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 측면에서 자유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존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믿음이 아니면 살 수 없도록 데려가십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믿음이 아니면 살 수 없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전심으로 의지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삶이 안되는 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모든 생활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의의 소망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의 동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한쪽 면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매일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주권적으고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즉 아빠가 바닥에 내려 앉아 자녀의 순종을 즐거움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 면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기쁘게 의존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확실히 세상과 구별됩니다. 사랑할 자유를 얻게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믿으면 의의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정죄할 자가 없고, 우리를 죄 아래 묶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지만 이 땅에 살면서 넘어질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의로운 자에게 합당하게 되는 그날을 끊임없어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넷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본문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지, 얼마나 열심히 종교생활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이 주시는 산 믿음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행위는 값없는 하나님이 은혜를 폐하므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높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죄책감과 두려움과 탐욕을 제거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위선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인간관계 속에 모든 진실성을 파괴합니다. 또 자기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파괴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죄책감을 느낄 때 회개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그 죄책감을 계속 가지고 자신을 자책하며 파괴하도록 유도하고 우울증과 두려움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탐욕을 품습니다. 자신의 재산이나 경제적 미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구제나 봉사 등 위험한 일을 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죄책감, 두려움, 탐욕은 모두 인간관계의 사랑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최책감과 두려움과 탐욕을 몰아낼 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모든 죄책감과 두려움과 탐욕이 사라지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자유롭게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믿음이 사랑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위 속에서 우리의 죄와 사탄을 정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은 우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을 기뻐할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낳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안에 우리를 통해 그분의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자유롭게 흐르는 사랑의 활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함께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을 주님 때문에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한 적이 있습니까? 요일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옆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내 힘과 육체의 능력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 이르는 길은 믿음으로, 복음에 빚진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와 감동은 언제나 사랑으로 열매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4. 바른 교훈과 거짓교훈

본문7-9절에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선생들이 들어와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진리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떡덩이에 펴지듯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불신앙으로 인도했습니다. 거짓교훈은 누룩과 같은데 누룩은 악한 영향력을 가진 나쁜 영향력을 말합니다. 진리에 벗어나게 하는 교훈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를 상하게 합니다. 나쁜 행실이 누룩입니다.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을 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자격없는 우리에게 은혜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고 그분께 좋은 평가를 받아서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중심을 담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자유자의 자리에 서길 원하십니다. 바른 교훈은 주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 그들을 흔드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갈라디아 성도들을 지켜주실 줄 확신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초신자들이나 자녀들을 믿어주고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심판을 가져옵니다. 본문 11절에서 바른 진리는 할례를 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복음대신 할례를 전했다면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핍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이와같이 교회에 거짓 교훈을 전하는 자들을 베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받을 때는 남자 음경의 끝부분을 잘라내는 것인데 아예 음경 자체를 베어버리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그만큼 거짓복음을 엄하게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고 병낫고 명성이 높아지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세상적인 축복을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복들입니다. 이러한 거짓 교훈을 경계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값을 대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큰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탄 뿐 아니라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마지막 주님 재림하실 때 완전한 의를 입어 천국 백성이 될 것을 소망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믿음과 성령의 역사인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참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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