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5:1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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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9-17 |
수요설교 250917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본문: 갈5:13-26
제목: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I. 서론
지난 주에 갈5:1-12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죄와 율법과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가진 성도는 마지막날의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고, 의의 소망을 붙들어야 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을 더 살펴보고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을 대조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사랑의 섬김과 진정한 자유
갈5:6절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은 행위에 의존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 즉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갈5:6절에서 사랑의 주제를 가져와 13절에서 ‘그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합니다.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죄와 율법에 종노릇하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여기서 육체란 죄를 짓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되므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서로 섬기면 우리는 자유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의 동기는 우리의 충만함을 나누는 기쁨이 있지만, 육체의 행위는 우리의 공허감을 채우려는 동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로 표현된 죄성을 가진 옛 자아는 깊은 공허감을 느끼고 자기 힘으로 그 공허감을 채우려 합니다. 종교적 수단으로는 율법을 사용할 것이고, 비종교적 수단으로는 술을 마시거나 다른 쾌락을 추구할 것입니다. 본문 13절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채워줄 수 있는 공허감을 스스로 채우려하다가 그 헛된 욕구의 노예가 되므로 다시 육체의 소욕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자유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입니다. 사랑의 동기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주시는 충만함을 나누는 기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용서와 도움과 인도와 소망으로 채워주실 때, 그분은 옛 자아가 물질을 축적하고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고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선용해야 합니다.
주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사람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귀한 사람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가 받은 자유를 사용하십시오. 참된 자유가 가져다 주는 사랑의 내용이 바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참 자유자는 자격없는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과 보좌를 다 내려놓고 고난과 멸시, 질고를 대신 받은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종노롯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본 받아 이웃을 위해 수고하더라도 대가를 바라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해와 용납과 희생입니다 .
본문 14절에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유익과 건강과 안전과 행복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성적인 자기사랑을 잣대 삼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계명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배고플 때 배를 채우기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줍니까? 여러분이 취업을 해서 기쁜 만큼 이웃이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 줍니까? 여러분이 직장에서 좋은 실적을 얻기를 원하는 만큼 동료직원도 그런 성과를 얻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기쁜 만큼 이웃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하기 원합니까? 이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사람다워진다고 기록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충족될 때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여 그 삶에 사랑이 넘쳐흐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는 만큼 그들의 행복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가득할 것이고 이웃이 회심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란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가능하게 되고 스스로 종노릇하므로 오히려 자유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15절은 사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줍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랑으로 서로 섬기지 않으면 결국 분쟁하게 되고 파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세상은 자기를 희생해서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가 결국 이긴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물고 먹습니다. 약점이 드러나면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 약점을 붙들어 상대를 없애고 자기가 살아나려고 합니다. 끝없이 경쟁해서 살아남아 최후의 1인이 되면 좋을 것 같지만 결국 다 죽고 나도 죽습니다. 마치 오징어 게임 드라마와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차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육체와 성령의 전쟁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타고난 본성과 너무나 반대가 되므로 완전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낙심에 대하여 바울은 본문 16-18절에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임재하시면 우리는 육체의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사랑으로 종노릇하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성도다운 삶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의미는 18절과 22절에 나옵니다.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요16: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감동하실 때 성령의 감동을 저버리지 말고 즉각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로 가라고 하시자 즉시 순종하니 거기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을 설명하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 의미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 말씀을 설명해주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성령은 기차의 기관차와 같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따라가지 않고 기관차인 성령의 힘에 이끌려 갑니다. 요15: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바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할 때 그 성령의 수액이 흘러나와 성령의 열매가 저절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또한 본문 22절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그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고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본문 16절과 18절에서 두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16절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고 18절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안에서 육체와 성령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6.17절의 요점은 전쟁이 아니라 성령의 승리가 됩니다. 16절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소욕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소욕들이 옛사람 중심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율법의 형벌이나 압제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성령께서 가져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열매이고, 사랑이 온 율법을 다 이룬다고 했습니다.
본문 19-21절은 육체의 일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성적 타락을 말하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자기중심적인 타락인 우상숭배, 주술, 그리고 관계가 깨어지는 육체의 일인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일들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고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기를 바라고 그 빚을 갚기를 기대합니다.
반면에 본문 22-23절에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제시됩니다. 이 아홉가지 열매는 절제라는 껍질 속에 8가지 조각이 들어있는 하나의 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살펴 본 육체의 일들은 복잡하고 혼란한 복수인 반면 성령의 열매는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로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습니다. 아홉가지 열매는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열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랑을 알게 됩니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까지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희락, 즉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으므로 영원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참된 화평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데서 오는 평화와 자유와 안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는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핍박하고 비난해도 오래 참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오래 참고 믿어 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약함과 허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비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고 주를 믿는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인생의 약함과 허물를 향한 깊은 자비와 긍휼의 눈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자비가 있으면 양선이 따라 옵니다. 양선이란 한마디로 선행입니다. 사람들의 한계와 약함을 이해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자기를 희생해서 그 약함과 필요를 채워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서 실제로 그 필요를 제공하는 선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충성의 열매가 맺힙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성경말씀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온유는 겸손과 부드러움과 강함이 다 포함된 성품입니다. 겸손해서 언제나 남을 먼저 헤아립니다. 절대로 남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서서 타협할 순간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제는 자신을 다스려 무엇이든지 지나치게 하지 않고 자기관리와 조절을 잘 합니다. 이 절제는 앞의 8가지 성령의 열매를 담는 그릇입니다. 이 절제가 없으면 8가지 열매들이 다 쏟아져 소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삶속에서 맺힐 때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바라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합니다. 자신들은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만 바라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렇게 은혜에 의존하는 믿음의 사고방식에서 자라는 것은 일이 아니라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본문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육체의 죄성은 모든 것을 전부 자가 주변에 다 모아서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자기중심성과 자기 중심적 욕망을 포함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모태로부터 태어 나는 순간 각색 정욕과 타락, 쾌락에 대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특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복종하지 않고, 그의 절대적 자비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옛 자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나도 못박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2:20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고, 이제 새로운 자아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고 새생명을 얻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옛 자아를 죽은 것으로 여기며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성령을 항상 의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문 26절에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이란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땅위의 영광을 말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세상적인 욕망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얻으려고 서로 시기 질투하고 다투고 분쟁합니다. 그러나 참된 영광은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면 나도 함께 영광을 받게 됩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안식과 기쁨을 누림으로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안식과 기쁨을 누릴 때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성령께서 우리 삶속에서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다스립니다. 주일날 설교말씀을 통해서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다가 은혜받은 성경구절이 있으면 그 말씀을 일주일 동안 묵상하기 위해 책상 앞이나 냉장고 등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묵상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물고 먹으며 만족하지 못하는 공허감의 노예로 부르시지 않고, 사랑으로 흘러 넘치는 충만한 자유로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날마다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미래에 대한 최고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그저 얻는 은혜입니다. 사랑의 비결은 자유이며, 자유의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전적인 확신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며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합시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려면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행하기 위해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회개하며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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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 갈5:13-26 | 2025-09-17 | 홍기칠 목사 |
72 |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 갈5:1-12 | 2025-09-10 | 홍기칠 목사 |
71 | 악속의 자녀 | 갈4:21-31 | 2025-09-03 | 홍기칠 목사 |
70 |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 갈4:12-20 | 2025-08-27 | 홍기칠 목사 |
69 |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 갈4:1-11 | 2025-08-13 | 홍기칠 목사 |
68 |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 갈3:23-29 | 2025-08-06 | 홍기칠 목사 |
67 | 율법과 약속 | 갈3:15-25 | 2025-07-30 | 홍기칠 목사 |
66 |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 갈3:6-14 | 2025-07-23 | 홍기칠 목사 |
65 |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 갈3:1-5 | 2025-07-16 | 홍기칠 목사 |
64 |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 갈2:16-21 | 2025-07-09 | 홍기칠 목사 |
63 | 믿음으로 의롭게 됨 | 갈2:11-16 | 2025-07-02 | 홍기칠 목사 |
62 |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사도직과 복음 | 갈1:11-24 | 2025-06-18 | 홍기칠 목사 |
61 | 복음의 유일성 | 갈1:6-10 | 2025-06-11 | 홍기칠 목사 |
60 | 그리스도의 복음 | 갈1:1-5 | 2025-06-04 | 홍기칠 목사 |
59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21:15-25 | 2025-05-28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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