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4:2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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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9-03 |
수요설교 250903 약속의 자녀
본문: 갈4: 21-31
제목:약속의 자녀
I. 서론
본문은 갈라디아 3, 4장의 결론 부분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중심사상인 믿음으로 의롭다합을 받는다는 것을 마무리 지으면서 율법과 복음, 행위와 믿음 차이, 종과 자유인의 차이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가 낳은 이삭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누구인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의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육체와 약속의 관계
본문 21절은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 중에 주님을 믿어 성도가 되었지만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간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유혹을 받아서 유대교의 월력을 따라 금식일을 지키고 명절을 지키고 각종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으면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도 이들과 같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유교적 종교성을 가지고 금식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더 잘 들어줄 것 같고 복을 더 많이 줄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 또한 율법주의적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금식기도나 성경읽기나 기도를 열심히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마치 자신의 공로인 양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간다면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22-23절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통하여 육체와 약속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2-23절은 “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은 창12-25장 사이에 나옵니다. 창12장에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이고 사라는 65세였으나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의 언약을 믿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15장에 나타나 다시 한번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들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기 종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를 열국의 아비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고향에서 떠나온지 10년이 지나도 자식을 얻지 못하니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 후손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창19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때 내년에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놀랍게도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에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인간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 이삭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난지 8일 만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라는 표로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합니다. 생후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면 피의 응고율이 제일 높아서 빨리 회복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22-23절에서 하갈이 낳은 아들은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는데 그것은 단지 혈통적인 아들이고 신분은 역시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여자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이삭이 태어났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율법의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마엘은 율법에 매인 종인 유대인을 나타내고, 이삭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인 그리스도인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에 합당한 반응은 오직 그 약속을 믿는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하는 육체의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2. 율법과 종의 관계
본문 24-25절에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어머니인 여자의 관점에서 율법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과 시내산에서 율법을 통해 모세와 맺은 약속을 가리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신분으로는 둘 다 종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여 죄의 종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시내산 율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율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약속의 땅이 아닌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은 이 율법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라는 것과 여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율법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예루살렘에 해당됩니다. 예루살렘은 율법을 절대시 하는 유대교의 근거지요 율법의 종살이를 하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시내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내산이 율법이 주어진 곳이라면 예루살렘은 율법을 실천하는 곳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시내산 언약과 어떤 점에서 비슷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갈은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계명에 순종하도록 도와주실 하나님의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있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5:29절에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의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육체를 따라 난 것처럼 율법은 주어졌으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이 자신들의 힘으로 낳은 아들은 상속자가 될 수 없었듯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 한 결과는 아무런 유업도 받지 못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며, 율법과 세상의 종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면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갈과 시내산의 두 번째 유사점은 둘 다 종이 될 자녀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상속자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어머니와 다름없는 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 했을 때 그들은 그 율법의 종이 됩니다.
3. 믿음과 자유의 관계
그런데 본문 26절에는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갈에 대한 설명을 한 후에 자유로운 여자인 사라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라는 모든 은혜의 자녀들의 어머니인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당시의 예루살렘과 대조가 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며 성도들이 그 시민입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아들들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유로운 여자 사라의 아들들인 성도들은 자유를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골3:1-3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자유는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며 우리의 생명은 이미 그 도시의 시민기록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삭을 낳았기 때문에 위에 있는 도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말하면 사라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그들에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28절에서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참생명은 이스마엘 생명처럼 단지 인간행위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참 생명은 우리 안에서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인합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 마3: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8:31-32절에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고 대꾸합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요8:37-40절에 “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아브라함의 행실을 전혀 닮지 않은 다른 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났을 지라도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 종과 자유자로 나누어 집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성도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도 다니고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쓴다고 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짜 아들이 있고 가짜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참 성도이지만 하나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오직 그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고 믿는 대신에, 그저 친교나 사업을 위해서, 혹은 몇대째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한다면 전혀 성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믿음과 결실의 관계
본문 27절에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54:1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스라엘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황폐한 예루살렘이 이전보다 번영하게 된다는 예언의 일부입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는 조국을 잃어버리고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아기를 낳지 못함으로 산고를 겪을 필요가 없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인 사라를 가리킵니다. 홀로 사는 여자란 포로시대가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와 축복을 누리게 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인용구절을 이전에는 아기를 낳지 못했지만 나중에 아들을 낳은 축복을 누렸고. 남편이 있는 하갈보다 더 많은 후손 그리스도인들을 거느리게 될 사라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갈은 육체적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힘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잉태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갈의 후손보다 사라의 후손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장래와 교회의 장래를 예언해준 말씀입니다. 순수한 복음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더 많아진다는 말입니다.
5.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적용
바울은 28-31절에서 성경을 예로 들어 얻는 진리를 세가지로 비교하며 적용하고있습니다. 첫째, 이삭이 태어난 것을 그리스도인이 태어난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람의 노력으로 얻은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율법의 비유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이삭은 사람의 능력으로 도저히 낳을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자식입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믿으면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인 것입니다.
둘째, 육체를 따라 태어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에 “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을 여기서는 박해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태어난 율법주의자들을 이스마엘에 비유했는데 그들은 성령을 따라 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박해했습니다. 이 적대감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으로 현재도 이어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약속을 따라 났다는 것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났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태어나야 성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한번은 어머니로부터, 다시 한번은 성령을 통해 다시 한번 더 태어나야 합니다. 요3장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 즉 진리인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롬8:14절에도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심으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통해 성령 안에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율법주의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복음적인 사람을 오히려 핍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다른 형제를 잘 정죄합니다. 신문칼럼을 보니 어느 교회 청년부 목사가 처음 교회 나온 대학생이 훼밍웨이가 쓴 소설‘노인과 바다’를 들고 왔는데 왜 무신론자, 자살한 작가의 책을 들고 왔느냐고 했답니다. 그 청년은 그 교회를 나가지 않고 다른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창2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대연회를 베풀었는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근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창21:12절에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주의의 결과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행위를 갈라디아 성도들의 의무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도 창21:12절을 인용하여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는 아무리 잘 믿는 것 같거나 착실하게 보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어 쫓깁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상속을 이을 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유대인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상속의 근거가 되지 못함을 일깨우고 유대주의자들의 거짓교리를 받아들인 자들을 내쫓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31절에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습니다. 바을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자기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라고 결론내립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자유함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유업의 상급을 다 이어 받게 된 것은 우리 안의 어떤 조건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자격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의 뜻을 행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삭과 같은 성도들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부담 아래 종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가 있으며 온전한 기쁨 속에서 영원히 그 일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게 하셨고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의 욕구를 새롭게 형성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거듭남으로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된 진정한 참 자유를 누리며 이 놀라운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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