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설교본문 | 출3: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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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9-14 |
주일오후설교 250914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약속
본문: 출3:13-22
제목: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약속
I. 서론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신 모세의 소명장이라고도 합니다. 지난 주에 출3장1-1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영성을 훈련시키고 드디어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출애굽 지도자로 부르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출애굽에 대하여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시고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본문 13절에 “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르 ㄹ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바르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그분에게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만에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서 그들에게 갑자기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그들이 틀림없이 당신의 신은 누구냐, 그의 성품은 어떠하냐, 우리가 그를 받을 만한 증거를 대라는 등의 말을 할것으로 예상되므로 무척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에 젖어버리고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잊어버리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태양신이나 암몬, 이방인들이 섬기는 몰렉,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처럼 분명한 이름을 가진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보내셨다는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고 도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80이 된 노인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만한 권위도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지도자 소명을 다섯 번이나 거절한 모세를 끝까지 설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러 갈 때 그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그들은 “그 하나님이 누구냐, 나에게 보여달라 보면 믿을 수 있다”라고 할 것이 예상됩니다. 그때 무엇이라 설명할 것입니까?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나타내신 바 하나님의 존재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떡, 선한 목자, 천국의 문, 세상의 빛,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게 됨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14절에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라고 하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 즉, “I am that I am” 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야웨, 야훼)는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전능자라는 뜻이고 여호와라는 본명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기에 너무 두려워서 발음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제3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여호와라 부르지 못하고 그냥 ‘아도나이(Lord)’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와서 ‘스스로 있는자’ 라는 4개의 자음문자인 야웨 혹은 야훼와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쳐 여호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십계명을 받고 너무 조심한 나머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여호와의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기 아버지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양반이 아니라는 핀잔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그리고 항상 계속하여 존재하실 분, 영원히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고 불변하시는 분이요 전능자이며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는 분이라는 자존성, 불변성, 영원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역사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말보다는 ‘불변의 약속의 하나님’이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실제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 여호와를 의지하면 애굽에서 나올 수 있고, 너의 모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애굽에 가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계시는 분이 너희를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모세는 다른 힘이 필요없고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이 언약의 말씀을 믿고 가서 선포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존재를 입증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합리화 시키노력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에 “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그들에게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가르쳐 주지 말고 그 이름에 합당한 역사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시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아주 먼 거리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실 구원계획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약속의 자녀로서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다가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니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목축을 위해 우물을 파니 물이 나왔는데 그랄 사람들이 와서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다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또 우물을 파니 물이 나왔습니다. 세 번이나 팠더니 그 사람들이 오지 않았고, 거기서 농사를 지으니 그 해에 백배의 소출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가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시고 반드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믿고 외삼촌 집에서 20년 세월을 보내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마침내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듯 목숨을 건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고쳐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이 이름이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나중에 열두 아들 중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그 애굽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요셉이 살아있을 때는 잘 살았으나, 그 후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가운데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이 약속들이 수일 내에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기 전에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믿음을 심하게 시험하는 것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하고 애굽에서 나온 장정 육십만, 전체 200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광야에서 멸망받았던 것과 모세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채 죽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 민족의 어느 특정한 세대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반드시 성취 시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받은 우리가 비록 죽는 다 해도 거룩하신 목적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본문 15절에서 자기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은 바로 너희 조상 때도 나 여호와가 함께하여 그들을 축복했으니 너희들도 모세를 통해 너희들에게 주는 내 언약을 믿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고 이삭과 야곱에게 그것을 확증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선포하면 됩니다. 지금도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받게 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6-17절에서도 모세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가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으니 너희를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으니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8절에서 “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 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믿음에 또 하나의 시험을 제공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사흘길 쯤 광야로 가는 것을 바로왕에게 허락받아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3일 길은 애굽의 현 거주지에서 시내산까지의 거리지만 바로왕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신앙의 개혁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예생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이제 저 멀리 가서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고, 바로 왕에게 가서 그렇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좀 쉬고 밥이나 더 잘 얻어먹고 잠이나 더 잘 자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로왕에게 가서 우리는 신앙을 위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니 허락해달라고 말하면 바로왕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말이냐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해라라고 말하며 당연히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모세에게 큰 시험이고 도전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9,20절에 하나님은 그 결과까지 예측하고 미리 모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처럼 걱정하는 모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미리 예언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애굽사람은 그 재앙을 그대로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애굽 바로왕은 재앙이 닥칠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적이 자꾸 나타나니 그 괴로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모세를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앙이 끝난 후에 드디어 출애굽하게 될텐데 그때 주실 축복까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21-22절에 “ 내가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시고, 그들의 생활의 안전까지 약속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고생했는데 이제 그 못받은 월급도 다 보상을 받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순종은 그 약속의 신실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생명을 건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생활의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예배드리러 삼일 길을 가겠다는 것은 신앙중심으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고 신앙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중심으로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고 성령충만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생활의 필요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소심하고 망설이며 두려워하고 불신하며 거역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수만 바라는 발람을 가장 중대한 예언을 하도록 등용하셨고,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도록 제멋대로인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유다 조차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쓰시기에 합당하거나 적합한 사람을 발견하기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 종말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 기뻐하시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르심을 변명으로 포기하려는 모세의 불신앙의 마음을 거룩한 능력과 오래참음으로 극복하시고 모세를 기어이 변화시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질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족함에도 그 부족함을 보완하여 기어이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부족할지라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선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 확신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본명인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영원불변하시고 전능하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영육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내 모습 이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에게 약속하셨듯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세상으로 나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증거할 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스스로 계신 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이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914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약속
본문: 출3:13-22
제목: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약속
I. 서론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신 모세의 소명장이라고도 합니다. 지난 주에 출3장1-1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영성을 훈련시키고 드디어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출애굽 지도자로 부르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출애굽에 대하여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시고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본문 13절에 “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르 ㄹ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바르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그분에게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할까요? 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만에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서 그들에게 갑자기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그들이 틀림없이 당신의 신은 누구냐, 그의 성품은 어떠하냐, 우리가 그를 받을 만한 증거를 대라는 등의 말을 할것으로 예상되므로 무척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에 젖어버리고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잊어버리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태양신이나 암몬, 이방인들이 섬기는 몰렉,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처럼 분명한 이름을 가진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을 보내셨다는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고 도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80이 된 노인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만한 권위도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지도자 소명을 다섯 번이나 거절한 모세를 끝까지 설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러 갈 때 그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그들은 “그 하나님이 누구냐, 나에게 보여달라 보면 믿을 수 있다”라고 할 것이 예상됩니다. 그때 무엇이라 설명할 것입니까?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나타내신 바 하나님의 존재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떡, 선한 목자, 천국의 문, 세상의 빛,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게 됨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14절에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라고 하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 즉, “I am that I am” 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야웨, 야훼)는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전능자라는 뜻이고 여호와라는 본명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기에 너무 두려워서 발음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제3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여호와라 부르지 못하고 그냥 ‘아도나이(Lord)’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와서 ‘스스로 있는자’ 라는 4개의 자음문자인 야웨 혹은 야훼와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쳐 여호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십계명을 받고 너무 조심한 나머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여호와의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기 아버지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양반이 아니라는 핀잔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그리고 항상 계속하여 존재하실 분, 영원히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고 불변하시는 분이요 전능자이며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는 분이라는 자존성, 불변성, 영원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역사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말보다는 ‘불변의 약속의 하나님’이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실제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 여호와를 의지하면 애굽에서 나올 수 있고, 너의 모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애굽에 가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계시는 분이 너희를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모세는 다른 힘이 필요없고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이 언약의 말씀을 믿고 가서 선포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란 존재를 입증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합리화 시키노력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에 “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그들에게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가르쳐 주지 말고 그 이름에 합당한 역사를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시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아주 먼 거리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실 구원계획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약속의 자녀로서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다가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니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목축을 위해 우물을 파니 물이 나왔는데 그랄 사람들이 와서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다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또 우물을 파니 물이 나왔습니다. 세 번이나 팠더니 그 사람들이 오지 않았고, 거기서 농사를 지으니 그 해에 백배의 소출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가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시고 반드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믿고 외삼촌 집에서 20년 세월을 보내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마침내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듯 목숨을 건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고쳐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이 이름이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나중에 열두 아들 중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그 애굽에서 야곱의 후손들이 요셉이 살아있을 때는 잘 살았으나, 그 후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가운데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이 약속들이 수일 내에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기 전에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믿음을 심하게 시험하는 것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하고 애굽에서 나온 장정 육십만, 전체 200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광야에서 멸망받았던 것과 모세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채 죽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 민족의 어느 특정한 세대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반드시 성취 시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받은 우리가 비록 죽는 다 해도 거룩하신 목적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본문 15절에서 자기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은 바로 너희 조상 때도 나 여호와가 함께하여 그들을 축복했으니 너희들도 모세를 통해 너희들에게 주는 내 언약을 믿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고 이삭과 야곱에게 그것을 확증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선포하면 됩니다. 지금도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받게 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6-17절에서도 모세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가서 그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으니 너희를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으니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8절에서 “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 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믿음에 또 하나의 시험을 제공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사흘길 쯤 광야로 가는 것을 바로왕에게 허락받아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3일 길은 애굽의 현 거주지에서 시내산까지의 거리지만 바로왕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신앙의 개혁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예생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이제 저 멀리 가서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고, 바로 왕에게 가서 그렇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좀 쉬고 밥이나 더 잘 얻어먹고 잠이나 더 잘 자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로왕에게 가서 우리는 신앙을 위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니 허락해달라고 말하면 바로왕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말이냐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해라라고 말하며 당연히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모세에게 큰 시험이고 도전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9,20절에 하나님은 그 결과까지 예측하고 미리 모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처럼 걱정하는 모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미리 예언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애굽사람은 그 재앙을 그대로 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애굽 바로왕은 재앙이 닥칠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적이 자꾸 나타나니 그 괴로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모세를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앙이 끝난 후에 드디어 출애굽하게 될텐데 그때 주실 축복까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21-22절에 “ 내가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시고, 그들의 생활의 안전까지 약속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고생했는데 이제 그 못받은 월급도 다 보상을 받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순종은 그 약속의 신실함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생명을 건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생활의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예배드리러 삼일 길을 가겠다는 것은 신앙중심으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고 신앙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중심으로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고 성령충만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생활의 필요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소심하고 망설이며 두려워하고 불신하며 거역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수만 바라는 발람을 가장 중대한 예언을 하도록 등용하셨고,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도록 제멋대로인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유다 조차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쓰시기에 합당하거나 적합한 사람을 발견하기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 종말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 기뻐하시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르심을 변명으로 포기하려는 모세의 불신앙의 마음을 거룩한 능력과 오래참음으로 극복하시고 모세를 기어이 변화시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질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족함에도 그 부족함을 보완하여 기어이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부족할지라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선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 확신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본명인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영원불변하시고 전능하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영육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할지라도 내 모습 이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에게 약속하셨듯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세상으로 나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증거할 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스스로 계신 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이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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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소명에 합당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 출4:1-17 | 2025-09-21 | 홍기칠 목사 |
72 |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약속 | 출3:13-22 | 2025-09-14 | 홍기칠 목사 |
71 |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 출3:1-12 | 2025-09-07 | 홍기칠 목사 |
70 | 갈대상자 | 출2:1-25 | 2025-08-31 | 홍기칠 목사 |
69 | 애굽 속의 이스라엘 | 출1:1-22 | 2025-08-24 | 홍기칠 목사 |
68 |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 창50:1-26 | 2025-08-17 | 홍기칠 목사 |
67 | 야곱의 마지막 축복기도 | 창49:1-33 | 2025-08-10 | 홍기칠 목사 |
66 |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 창48:1-22 | 2025-08-03 | 홍기칠 목사 |
65 | 고센 땅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 창47:1-31 | 2025-07-27 | 홍기칠 목사 |
64 | 내가 너와 함께 가겠노라 | 창46:1-34 | 2025-07-20 | 홍기칠 목사 |
63 | 언약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 창45: 16-28 | 2025-07-13 | 홍기칠 목사 |
62 | 요셉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섭리 | 창45:1-15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61 | 목숨을 건 중보기도 | 창44:1-3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60 |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 창43:1-34 | 2025-06-22 | 홍기칠 목사 |
59 |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 창42: 18-38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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