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설교본문 | 출15:22-16:36 |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 설교일 | 2025-12-28 |
주일오후설교 251228
본문: 출15: 22-16:36
제목;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
I. 서론
지난 주에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부른 모세의 노래를 살펴보았습니다. 미리암도 여성들과 함께 소고치며 찬양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으니 모세나 미리암처럼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길을 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하나님
본문 22절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기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광야의 시련과 시험은 우리의 심령의 악함과 육신적인 부패를 드러나게 하여 우리의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광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것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삼일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인정할 때, 그는 광야에 대해 인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쓸쓸하고 황량한 광야가 됩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많은 것을 제공하지만 영적인 성도들에게는 그 세상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만 영혼의 허무와 고통일 뿐입니다. 광야란 여행하는 여행지일 뿐입니다. 그곳에 집을 지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마치 여기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정착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한 저 천국본향을 바라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땅이었고, 광야는 다만 그 유업을 향하여 갈 때 통과하였던 낯선 땅일 뿐이듯이 성도들에게도 이 세상은 통과해야 할 낮선 땅일 뿐입니다.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지상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죄의 즐거움과 세상의 매력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과 교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땅에서는 그 갈급한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소원을 만족케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 즉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한 말씀을 따라 주님께로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문 23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쓰라린 시련이요 실제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도 찾을 수 없는 뜨거운 모래밭 광야를 사흘 동안이나 걸어와 물이 있는 곳까지 왔지만 그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비참한 실망감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광야길을 편하고 쉽게 가게 하실 줄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정확히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메마름과 쓰라림 뿐입니다. 경험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서 거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광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이 바로 마시지 못할 쓴물 마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일전에만 하더라도 홍해를 건넌 기쁨으로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이제 시련이 닥치자 모세를 원망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됩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마라로 인도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환경에 대한 원망이나 날씨에 대한 불평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매일의 삶의 시련에 대한 불평은 “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불신앙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그들의 눈이 더 이상 하나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그들 앞에 증거된 여호와의 능력이나 홍해의 기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켜녕, 하나님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마라에 이를 때 이런 원망을 하지 않습니까?
본문 25절에 “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무한한 인내력으로 그들을 또 참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보여주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무를 그에게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 나무의 달게 하는 특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예비하심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쓴 물을 달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 나무는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벧전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연히 쓴 것을 우리에게 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것 이외에 지상에서 우리가 당면한 쓴 잔을 달게 할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라는 십자가, 그 수치의 십자가, 주님에 대한 세상의 판단의 증표였던 이 나무로 인하여 달게 변한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운 고난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서 그를 위하여 수치와 배척을 참고 견디면, 주님과 연결된 단맛의 본질이 마라 자체를 마실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에 대해 일체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구속함을 받았고 이제 그분을 위해 속량되었으니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요구사항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놀라운 은혜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은혜는 우리들을 하나님께 더욱 빚지게 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을 꾸짖지 않으시고 자신의 말씀을 따르도록 교육할 기회로 사용하신 선하신 분입니다.
축복은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피 아래 있었고, 상징적으로 홍해라는 죽음을 지나 부활의 근거 위로 옮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과 법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이 박탈되지는 않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의 재앙들은 우리에게 닥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실 때 여호와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계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시작할 때 치유와 건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26절을 마무리 하는 문장에서 개별적인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치료함에 있어서 의학적 수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도록 가르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의 한마디 명령에 의해 단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물속에 한 나무를 던짐으로써 고쳐졌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의 첫 번째 치유에 대한 말씀에서 치료하는 수단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 왕하2: 19-22절을 보면 엘리사에게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 물이 나쁘다고 하니까 그 물을 고치기 위한 수단으로 소금을 사용하도록 하셨고 그의 종 이사야에게 히스기야를 고칠 때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딤전5:2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의료적 수단을 사용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세상의 의학으로 불가능할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보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라고 했습니다. 엘림은 마라의 완성입니다. 먼저 마라의 쓴 물이 나뭇가지에 의해 단물로 변했고 그 후에 깨끗한 우물과 종려나무가 그늘과 휴식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그의 십자가 원리를 일상생활에 성실히 적용할 때 그분을 위한 고난의 쓴맛도 달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해 마련하신 순전한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순종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주시는 만족을 말합니다. 영혼의 만족은 말씀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열둘의 물샘과 70주의 종려나무는 그리스도께서 12사도들을 내보내시고 70인 제자를 보내실 때의 그 숫자와 일치합니다. 엘림은 성도들에게 행복한 장소인 동시에 복음증거의 또 다른 사명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2. 만나와 메추라기를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광야로 나가게 됩니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땅으로부터 점점 더 먼곳으로 인도되었고 황량함과 죽음만이 존재하고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로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했기 때문에 광야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강건한 믿음과 용기로 그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출16:1절에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달 십오일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달의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 증언을 말하고, 15일은 5의 3배가 되는 수인데 성경에 5라는 숫자는 은총, 은혜를 의미합니다. 3은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둘째달 15일 이란 숫자를 결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증거하고 나타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결과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은혜가 그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어두운 배경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열가지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고 홍해로부터 건짐을 받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행한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온 회중이 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도자 모세를 대항했습니다. 3절에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줄 죽게 하는도다”라고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고, 무자비한 애굽사람들의 노예로 있었는데 그들의 고기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거나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 입에서 여호와에 대한 극심한 불신앙과 불평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미 출3:1절에 그들이 시내산에서 여화와를 경배하게 되리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들을 죽도록 버려두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의 이 반항적 불신앙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이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예비하신 양식의 아름다운 상징이 됩니다. 이 양식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만나가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만나는 초자연적인 산물입니다.
만나는 땅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제조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로부터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영혼의 영적 만나로서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얼마나 큰지 살펴보면 본문 16절에 각 사람은 먹을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호멜씩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은 약 2리터인데 200만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호멜씩 거둔다 해도 약 4, 500톤이나 됩니다. 단 하루 공급을 위하여 화물차 하나에 30개의 화물칸에 15톤씩 실을 수 있는 화물열차 열대가 필요합니다. 해마다 수백만톤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40년간 계속되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기적적이고 거룩한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2) 만나는 백성들이 있는 곳에 바로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하여 광야를 헤멜 필요가 없이 바로 그들의 장막집 앞에서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바로 우리 손에 성경책이 들려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3) 만나는 그 크기가 작고 흰색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드러난 진리를 한권 성경책에 총망라하여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모양이 작고 둥글며 모가 나지 않았듯이 말씀이 조화와 정확성과 온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흰색이었습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시2:6절에 “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도덕적으로 순결하며 영적으로 순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실수나 모순이나 흠이 없습니다.
4) 만나는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올바른 식사는 식탁에 있는 음식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격적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듯이, 말씀의 약속과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씹어서 섭취하듯이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며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소화시키듯이 말씀을 섭취한 결과 나의 영적건강이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묵상한 말씀이 나의 행함과 섬김을 위한 동력이 되어 생활 속에서 열매가 나타날 때라야 그 말씀이 완전히 소화된 것입니다.
5) 매일 아침에 만나를 거두어야 하고 반드시 그날 사용해야 하며 안식일에는 쉬어야 합니다.
오늘 거둔 만나는 내일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새로운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 날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그 전날인 여섯째 날에는 두배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전에는 지키지 않았던 7일 한 주 제도를 확립하셨습니다. 이 첫 번째 안식일 준수는 지금까지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안식을 지키는 것은 안식을 제공하신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영혼도 날마다 공급하는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매일 규칙적으로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그날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매일성경 큐티 자료를 사용하거나 자신이 정해놓은 말씀의 분량만큼 묵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일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 이렇게 한다면 분명히 성도들의 삶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를 얻기 위해 허리를 굽혀서 노동을 해야 거둘 수 있고, 거둔 것을 그날에 모두 먹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말씀을 섭취하려면 매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유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참다운 안식을 누리기 위해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안식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잘 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6) 만나는 법궤속에 보존되었고, 가나안에 도착할 때 까지 있었습니다.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 안에서는 단 하루도 간수할 수 없었으나 성막안에서는 40년이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년동안 광야에서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부족함없이 풍성하게 양식을 공급해주셨는가를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하셨고, 우리가 천국가는 그날까지 보존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뿐 아니라 매추라기도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평생토록 이 말씀의 양식을 풍성하게 먹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영적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살아가면서 마라의 쓴 물과 같이 고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생활을 40년 이상 해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풍성한 말씀의 은혜와 기적을 베푸셔서 영화로운 천국에 이를 때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말씀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얻은 성도는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1228
본문: 출15: 22-16:36
제목;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
I. 서론
지난 주에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부른 모세의 노래를 살펴보았습니다. 미리암도 여성들과 함께 소고치며 찬양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으니 모세나 미리암처럼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길을 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하나님
본문 22절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기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광야의 시련과 시험은 우리의 심령의 악함과 육신적인 부패를 드러나게 하여 우리의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광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것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삼일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인정할 때, 그는 광야에 대해 인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쓸쓸하고 황량한 광야가 됩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많은 것을 제공하지만 영적인 성도들에게는 그 세상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만 영혼의 허무와 고통일 뿐입니다. 광야란 여행하는 여행지일 뿐입니다. 그곳에 집을 지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마치 여기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정착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한 저 천국본향을 바라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땅이었고, 광야는 다만 그 유업을 향하여 갈 때 통과하였던 낯선 땅일 뿐이듯이 성도들에게도 이 세상은 통과해야 할 낮선 땅일 뿐입니다.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지상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죄의 즐거움과 세상의 매력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과 교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땅에서는 그 갈급한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소원을 만족케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 즉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한 말씀을 따라 주님께로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문 23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쓰라린 시련이요 실제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도 찾을 수 없는 뜨거운 모래밭 광야를 사흘 동안이나 걸어와 물이 있는 곳까지 왔지만 그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비참한 실망감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광야길을 편하고 쉽게 가게 하실 줄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정확히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메마름과 쓰라림 뿐입니다. 경험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서 거의 모든 실패의 원인은 광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이 바로 마시지 못할 쓴물 마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일전에만 하더라도 홍해를 건넌 기쁨으로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이제 시련이 닥치자 모세를 원망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됩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마라로 인도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환경에 대한 원망이나 날씨에 대한 불평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매일의 삶의 시련에 대한 불평은 “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불신앙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그들의 눈이 더 이상 하나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그들 앞에 증거된 여호와의 능력이나 홍해의 기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켜녕, 하나님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마라에 이를 때 이런 원망을 하지 않습니까?
본문 25절에 “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무한한 인내력으로 그들을 또 참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모세에게 한 나무를 보여주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무를 그에게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 나무의 달게 하는 특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예비하심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쓴 물을 달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 나무는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벧전 2:4절에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연히 쓴 것을 우리에게 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것 이외에 지상에서 우리가 당면한 쓴 잔을 달게 할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라는 십자가, 그 수치의 십자가, 주님에 대한 세상의 판단의 증표였던 이 나무로 인하여 달게 변한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운 고난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서 그를 위하여 수치와 배척을 참고 견디면, 주님과 연결된 단맛의 본질이 마라 자체를 마실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에 대해 일체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구속함을 받았고 이제 그분을 위해 속량되었으니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요구사항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놀라운 은혜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은혜는 우리들을 하나님께 더욱 빚지게 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을 꾸짖지 않으시고 자신의 말씀을 따르도록 교육할 기회로 사용하신 선하신 분입니다.
축복은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피 아래 있었고, 상징적으로 홍해라는 죽음을 지나 부활의 근거 위로 옮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과 법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이 박탈되지는 않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의 재앙들은 우리에게 닥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실 때 여호와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계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시작할 때 치유와 건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26절을 마무리 하는 문장에서 개별적인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치료함에 있어서 의학적 수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도록 가르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의 한마디 명령에 의해 단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물속에 한 나무를 던짐으로써 고쳐졌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의 첫 번째 치유에 대한 말씀에서 치료하는 수단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 왕하2: 19-22절을 보면 엘리사에게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 물이 나쁘다고 하니까 그 물을 고치기 위한 수단으로 소금을 사용하도록 하셨고 그의 종 이사야에게 히스기야를 고칠 때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딤전5:2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의료적 수단을 사용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세상의 의학으로 불가능할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보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라고 했습니다. 엘림은 마라의 완성입니다. 먼저 마라의 쓴 물이 나뭇가지에 의해 단물로 변했고 그 후에 깨끗한 우물과 종려나무가 그늘과 휴식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그의 십자가 원리를 일상생활에 성실히 적용할 때 그분을 위한 고난의 쓴맛도 달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해 마련하신 순전한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순종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주시는 만족을 말합니다. 영혼의 만족은 말씀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열둘의 물샘과 70주의 종려나무는 그리스도께서 12사도들을 내보내시고 70인 제자를 보내실 때의 그 숫자와 일치합니다. 엘림은 성도들에게 행복한 장소인 동시에 복음증거의 또 다른 사명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2. 만나와 메추라기를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광야로 나가게 됩니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땅으로부터 점점 더 먼곳으로 인도되었고 황량함과 죽음만이 존재하고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로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했기 때문에 광야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강건한 믿음과 용기로 그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출16:1절에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달 십오일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달의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 증언을 말하고, 15일은 5의 3배가 되는 수인데 성경에 5라는 숫자는 은총, 은혜를 의미합니다. 3은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둘째달 15일 이란 숫자를 결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증거하고 나타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결과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은혜가 그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어두운 배경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열가지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고 홍해로부터 건짐을 받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행한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온 회중이 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도자 모세를 대항했습니다. 3절에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줄 죽게 하는도다”라고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고, 무자비한 애굽사람들의 노예로 있었는데 그들의 고기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거나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 입에서 여호와에 대한 극심한 불신앙과 불평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미 출3:1절에 그들이 시내산에서 여화와를 경배하게 되리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들을 죽도록 버려두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의 이 반항적 불신앙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이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예비하신 양식의 아름다운 상징이 됩니다. 이 양식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만나가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만나는 초자연적인 산물입니다.
만나는 땅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제조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로부터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영혼의 영적 만나로서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얼마나 큰지 살펴보면 본문 16절에 각 사람은 먹을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호멜씩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은 약 2리터인데 200만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호멜씩 거둔다 해도 약 4, 500톤이나 됩니다. 단 하루 공급을 위하여 화물차 하나에 30개의 화물칸에 15톤씩 실을 수 있는 화물열차 열대가 필요합니다. 해마다 수백만톤의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40년간 계속되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기적적이고 거룩한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2) 만나는 백성들이 있는 곳에 바로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하여 광야를 헤멜 필요가 없이 바로 그들의 장막집 앞에서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바로 우리 손에 성경책이 들려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3) 만나는 그 크기가 작고 흰색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드러난 진리를 한권 성경책에 총망라하여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모양이 작고 둥글며 모가 나지 않았듯이 말씀이 조화와 정확성과 온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흰색이었습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시2:6절에 “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도덕적으로 순결하며 영적으로 순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실수나 모순이나 흠이 없습니다.
4) 만나는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올바른 식사는 식탁에 있는 음식을 자기 것으로 취하여 씹고 소화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격적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듯이, 말씀의 약속과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씹어서 섭취하듯이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읽으며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소화시키듯이 말씀을 섭취한 결과 나의 영적건강이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묵상한 말씀이 나의 행함과 섬김을 위한 동력이 되어 생활 속에서 열매가 나타날 때라야 그 말씀이 완전히 소화된 것입니다.
5) 매일 아침에 만나를 거두어야 하고 반드시 그날 사용해야 하며 안식일에는 쉬어야 합니다.
오늘 거둔 만나는 내일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새로운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 날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그 전날인 여섯째 날에는 두배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전에는 지키지 않았던 7일 한 주 제도를 확립하셨습니다. 이 첫 번째 안식일 준수는 지금까지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안식을 지키는 것은 안식을 제공하신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영혼도 날마다 공급하는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매일 규칙적으로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그날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매일성경 큐티 자료를 사용하거나 자신이 정해놓은 말씀의 분량만큼 묵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일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 이렇게 한다면 분명히 성도들의 삶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를 얻기 위해 허리를 굽혀서 노동을 해야 거둘 수 있고, 거둔 것을 그날에 모두 먹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말씀을 섭취하려면 매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유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해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참다운 안식을 누리기 위해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안식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잘 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6) 만나는 법궤속에 보존되었고, 가나안에 도착할 때 까지 있었습니다.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 안에서는 단 하루도 간수할 수 없었으나 성막안에서는 40년이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년동안 광야에서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부족함없이 풍성하게 양식을 공급해주셨는가를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하셨고, 우리가 천국가는 그날까지 보존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뿐 아니라 매추라기도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평생토록 이 말씀의 양식을 풍성하게 먹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영적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살아가면서 마라의 쓴 물과 같이 고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생활을 40년 이상 해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풍성한 말씀의 은혜와 기적을 베푸셔서 영화로운 천국에 이를 때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말씀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얻은 성도는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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