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 설교본문 | 마3:1-17 |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 설교일 | 2026-09-13 |
20260913 주일오전설교
제목: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본문: 마3:1-17
I. 서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3장은 길고 긴 침묵의 시대를 깨뜨리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역사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시기를 '침묵기' 또는 '중간기'라고 부릅니다. 이 길고 어두운 침묵 속에 사람들은 절망했고, 영적인 기근에 허덕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침묵을 깨고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외사촌이며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화려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척박하고 거친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불모지인 유대광야를 사역지로 삼은 것은 조상들이 불신앙 때문에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던 일을 연상시키고, 현재 광야처럼 메말라버린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고 구약 사40:3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1~12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13~17절)이라는 두 가지 핵심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400년의 침묵을 깬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삶에서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지 깊이 있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II. 본론
I. 참된 회개는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10)
본문 1절부터 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첫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단어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감정적인 후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각의 변화, 생각의 너머로 나아가는 전 인격적인 방향의 전환을 뜻합니다. 즉, 내가 내 삶의 주인 되어 살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해 180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옛사람은 죽고 성령에 의한 새로운 삶의 변화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주인되신 하나님께 돌아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될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고, 구원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앞으로 가게 될 내세의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재림의 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지금 곧 오신다는 말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는 모든 통치영역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임했으나, 예수재림 때 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모든 영역 속에 나타나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심령을 다스려 주심으로 심령천국이 임하고, 내 가정을 다스려 주실 때 가정천국이 임하며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완전한 다스림이 임할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장차 올 것임을 예언했지만 세례요한은 오신 그 메시아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사40:3절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는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광야의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그 거친 바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의 옷은 당시 유행했던 부드러운 양털로 만든 사치스런 옷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으며, 옷이 느슨했기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이것은 가죽옷을 입고 에덴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같은 죄인의 예표였습니다. 야생에서 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먹고 살았던 그의 생활은 솔직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왕이 행차할 때는 미리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백성으로 하여금 길을 닦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태는 메시아를 왕에 비유했습니다.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구부러졌고 마귀로 말미암아 거칠어진 것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 회개를 외치며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이신 아버지 요셉을 도와 일을 하다가 이제 30세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가 되자, 역시 30세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길잡이로서 유대광야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회개를 외치지 않고 유대광야에서 외친 것은 사40:3절의 구약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광야에서 회개를 외친 것은 그 배경에 왕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오심을 알리는 영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 하나만으로 구원이 보장된다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인데 율법대로 행하기 보다는 그들 조상의 전통에 의존하는 종교적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절처한 십일조를 바치며, 길을 가다가 정시 기도시간이 되면 두손을 들고 기도하고 구제할 때는 사람들에 보는 앞에서 드러나게 하므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열심으로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자들로서 복음의 가장 큰 대적이요 이단세력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유대사회에서 부유한 상류층의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자들로서 천국과 지옥, 부활과 영혼불멸을 거부하며 현실적인 이성주의자들이었습니다.
7절에서 9절을 보면 요한은 그들의 영적 교만을 무섭게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랴 하더냐”고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사탄의 자식들이란 말로서 이들이 회개의 세례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경우 임박한 진노를 피하지 못하고 망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유대인들특히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구원은 그들만의 것인 줄 알고 회개를 거부하는 독선과 자만에 가득찬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에 철퇴를 가하면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가 있다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회개의 임박성을 강조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주었느나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사복음서 주석가이자 설교가인 무디(D.L. Moody) 목사는 어느 청년이 회개가 무엇인지 질문했을때 "청년, 자네가 어두운 밤길을 걸어 벼랑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해보게. 누군가가 '그쪽은 낭떠러지다! 돌아서라!'라고 소리쳤네. 자네가 그 소리를 듣고 '아,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해서 회개가 끝난 것인가? 아니다. 슬퍼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벼랑을 등지고 안전한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실제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라네.“ 라고 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감정의 눈물에 머물지 않고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썩은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듯, 회개하지 않은 심령에서는 거룩한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는 혈통이나 종교적 의식, 오랫동안 다닌 교회의 경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겸손히 인정하고, 삶의 구체적인 열매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심판의 위기 앞에, 우리는 과연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11~12)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11절에서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메시야되신 예수님께로 마음을 향하도록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주기 위해 회개의 물세례를 주는데 불과한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왕이신 예수님의 신발 끈을 메거나 신발을 드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문화에서 주인은 거친 땅을 걸을 때 싯는 신발끈이 달린 가죽신과 평소에 신는 샌들처럼 생긴 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예들은 주인이 어느 한 신발을 신으면 나머지 한 신발을 들고 다녀야 했고, 신발끈을 묶거나 푸는 일을 했습니다. 이 일은 노예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의 가장 천한 노예가 될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 만큼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 이후에 오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세례의 본질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설명합니다. 물 세례는 외형적인 정결 의식이자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불의 세례는 인간의 내면을 완전히 거듭나게 하고, 죄악을 태우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의미합니다. 물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라 형식적인 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 구원의 문제입니다.
12절의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하게 하시는 비유는 마지막 때의 심판을 뜻합니다. 추수할 때 농부가 타작마당에서 키를 가지고 쭉정이는 제거하고 알곡은 취하여 곡간에 들이고 알곡을 제외한 나머지 찌꺼기는 불에 태우듯이 지금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다면 알곡이 되어 천국백성이 되지만 회개없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타지 않는 불에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역사의 최종 판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과거 금을 정련하는 전통 방식에는 '용광로의 불'이 사용되었습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금빛을 띠고 있어도 정련공은 불 속에 그것을 넣어봅니다. 진짜 금은 섭씨 1,000도가 넘는 거센 불길 속에서도 녹아내릴 뿐 소멸하지 않고 순도가 더 높아지지만, 금으로 도금된 가짜나 불순물은 불 속에서 다 타버리거나 검게 그을려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과 불 세례는 우리의 삶에서 위선과 거짓, 거품을 태워버립니다. 우리가 고난의 불을 통과할 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룩한 불길 앞에 설 때,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인 야망과 종교적 겉치레는 태워지고 오직 순전한 알곡 같은 믿음만 남아 곳간에 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내면의 타작마당에서 키를 들고 성령의 불로 우리를 정결하게 다듬어가십니다.
3. 예수님의 세례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입니다 (13~17)
본문 13절 이하에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요단강에 나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십니다. 요한은 놀라 말립니다. 14절에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15절의 핵심 구절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적당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죄인들인 인간의 대표자가 되셔서 세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받는 세례의 자리에 서심으로, 스스로를 죄인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 인생과 똑같이 체휼하시기 위해 죄인의 자리인 요단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거룩한 동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인류 구원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 예수로 이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인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께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며,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순간 성부 하나님의 음성, 성자의 받으심, 성령의 비둘기 같은 임재를 통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온 천지에 공식적으로 선포됩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순종이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구속사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동안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캄캄하게 닫혔던 하늘문은 비로소 활짝 열리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속성인 온유, 순결, 화평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을 공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 위에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택함을 입은 자라는 의미의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자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이 내려와 증거하셨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직접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함으로써 인간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성삼위 하나님이 동역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3장은 2,000년 전 요단강가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과 적용을 요구합니다.
첫째,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주일에 드리는 예배와 기도문 속에만 존재하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는 교회의 문을 나설 때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언어생활과 경제 생활, 그리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습관들을 하나씩 정직하게 끊어내십시오. 가정과 직장에서 정직함과 겸손함이라는 '삶의 열매'로 나의 회개가 진짜임을 증명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내 안의 불순물을 태우시는 '성령의 불'을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종교적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내 힘으로는 내 안의 이기심, 탐욕, 미움을 태울 수 없습니다.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 오늘 내 안의 알곡은 남기고, 가라지와 같은 종교적 위선과 죄악은 성령의 불로 태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죄를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 매일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처럼 '모든 의를 이루는 겸손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의 세례 현장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겸손이 하늘을 열었습니다. 억울하거나 낮아져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주님의 요단강 세례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공동체의 유익과 하나님의 의를 위해 먼저 낮아지고 손해 보는 길을 선택할 때, 우리 삶 위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과 하늘의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처럼, 그리고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처럼,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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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예수 그리스도께 닻을 내리라 | 히2:1-8 | 2026-05-31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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