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성도의 실천적 삶의 지혜
2026-10-11 21:07:41
홍기칠
조회수   5
설교본문 마7:1-29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6-10-11

20261011 주일오전설교 (성도의 실천적 삶의 지혜)

제목: 성도의 실천적 삶의 지혜

본문: 마7: 1-29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선포하신 그 위대한 설교, '산상수훈(마태복음 5장~7장)'의 마지막 장인 마태복음 7장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시며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선포하셨고, 6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거하는 신앙인의 거룩한 영적 습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인 7장에 이르러, 이 모든 가르침을 우리 삶의 실제적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결단해야 하는지 그 결정판을 제시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을 관통하는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아는 신앙에서 실천적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지식적 동의나 감정적 은혜에 머무는 신앙은 결코 우리를 구원의 반석 위에 세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 시민의 참된 실천적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타인을 비판하지 말고, 나를 살피며 사랑의 법을 실천하라 (1-12)

예수님께서는 7장의 문을 열며 성도의 실천적 삶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본문1-2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정죄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타인을 심판하는 교만한 태도를 뜻합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말씀이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없을 때 비판하게 되고 상대방을 헤아리는 만큼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판의 맹점을 깨우치기 위해 아주 유머러스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즉, 남의 눈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는 정확히 보면서, 정작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거대한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들보란 한옥을 지을 때 지붕을 가로로 떠받치는 큰 통나무로 된 대들보를 말합니다. 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인데 과장법을 사용하여 비교한 것입니다. 들보를 눈에 넣고 있는 사람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영적 시력 상실 상태에 빠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깨닫지 못할 때, 타인을 향한 잣대는 거룩한 권면이 아니라 파괴적인 정죄가 됩니다.

 

본문 5절에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난 후에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칫하면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잘못만 비판하는 경우에는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자가 될 뿐이므로 자신을 철저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은 거룩한 복음은 모든 자에게 개방되어야 하지만 그 진리의 고귀성은 항상 더러운 자로부터 방어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앞의 1-5절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그 말씀이 진리에서 떠난 이단이나 배교자, 변질자 등을 다 수용하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관한 절대적인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생활에 대해서는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판 대신 무엇을 채워야 합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올바른 삶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인 기도에서 나옵니다. 본문 7-11절에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내 욕망을 채우라는 기복적 주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영적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를 지속하라는 뜻인데 세 번이나 강조한 것은 갈수록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소원이라면, 찾는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탐구를 말합니다. 이어서 두드리는 것은 그 목적에 도달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순서로 배열되었습니다. 세 번식이나 반복하는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나 사도바울의 기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간절히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성령충만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모든 필요가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은 돈이 있으면 다 가질 수 있듯이 성도에게 성령충만은 말씀충만, 예수 충만이므로 그 속에 우리의 필요를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은 기도하는 자의 태도를 말한 것으로서 그 유명한 기독교의 황금률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그 많은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 최고의 삶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사랑은 구약의 대강령이요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경우를 자기의 경우처럼 생각하고 대접하는 것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구약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대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는 자는 그와 같이 남의 요구에 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웃도 한 몸 이룬 형제로서 마땅히 사랑해야 할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의 시선을 거두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사랑과 배려를 먼저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 천국 시민의 첫 번째 법칙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한 저명한 미술관에 수세기 동안 어둡고 칙칙한 색조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던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구도가 나쁘다", "색감이 어둡고 조잡하다"며 작품을 낮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다 복원 전문가들이 정밀 청소와 복원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수세기 동안 쌓였던 찌든 때와 누렇게 변색된 수지 코팅층을 거두어내자,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거장의 찬란한 빛과 섬세한 필치가 드러났습니다. 그림 자체가 조잡했던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덮여 있던 '수세기의 오염물과 먼지'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흠잡고 비판하는 그 시선은 상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의 눈에 덮여 있는 교만과 편견이라는 찌꺼기를 거두어낼 때, 비로소 그 사람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의 눈의 '티'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제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타인의 가려진 존귀함을 발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좁은 문, 참된 열매의 길을 걸으라 (13-23)

예수님은 본문 중반부에서 신앙의 길에는 중간 지대가 없음을 명확히 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황금률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두 개의 문, 두 개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의 과정입니다. 본문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고 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편안함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가기에 외롭지 않고 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좁은 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내 자아를 내려놓고,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며, 말씀의 기준에 나를 맞추어야 하는 외롭고 고된 길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 길 끝에만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좁은 문을 지나가는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15). 그들은 사람을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거나 이미 좁은 길로 가는 성도를 넓은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거짓 예언자들을 이리에 비유했습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의 무리에 나아오지만 실상은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속적인 기복주의, 인본주의적 위로, 헛된 이단 사상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는 영적 이리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거짓 예언자들이 성도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사실상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기 때문에 정확히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그 열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적 열매는 단순한 사역의 규모나 은사의 나타남이 아닙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아름답고 휼륭해도 그 생활이나 행동은 거짓되고 악합니다. 추수 때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낫을 들고 오실 때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잘 보존하시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때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심판 때입니다.

 

앞서 나무열매에 대한 비유가 현실적인 것이라면 본문 21절 이후의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인 것으로 예수님은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21절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했습니다. 특히 이 교훈은 거짓 예언자의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조물주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시며 우리의 구주시요 심판주가 되십니다.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지만 그 궁극적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중심에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요소가 되지만 아버지의 뜻에서 멀리 떠나있는 자에게는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맙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목적이 아닌 도구나 방편으로 삼아 능력을 행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도 마귀의 영을 받아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그 삶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성품과 순결한 열매가 없다면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단호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준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연조, 화려한 직분, 외형적인 봉사의 '잎사귀'만 무성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과 시험이라는 폭풍이 밀려올 때, 내 신앙의 뿌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라는 깊은 암반층에 박혀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외형적 자랑을 내려놓고 내 삶에 그리스도의 성품과 순종이라는 참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축원합니다.

 

3.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24-29)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전체를 마무리 지으시며, 결론으로 '두 가지 기초 위에 집을 지은 건축자'의 비유를 선포하십니다. 2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아주 명확합니다. 둘 다 집을 지었습니다. 둘 다 '말씀을 들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행함(순종)'의 여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행할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란 말씀이라는 절대적 기준 위에 삶의 기초를 두고, 듣고 깨달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순종함으로 깊이 파 내려간 인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이란 말씀을 들었으나 행하지 않고, 세상의 유행, 자기 경험, 편의주의라는 변동성 높은 모래 위에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을 말합니다.

 

평상시에는 두 집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평화로울 때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훨씬 빠르고 쉽게 지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의 때가 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본문 25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라고 했는데 여기서 비, 창수, 바람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영적 시련, 고난, 질병, 경제적 위기, 그리고 마침내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심판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비롯되는 진노의 결과입니다. 이 심판은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때와 장소에 갑자기 임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29절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지도자였던 바리새인, 율법학자,서기관들의 교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권위와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명물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건설할 당시, 거센 거친 태평양 조류와 잦은 지진 때문에 교각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습니다. 엔지니어들은 이 거대한 다리를 안전하게 세우기 위해, 바다 표면의 물결이나 모래층을 완전히 무시하고 바닷속 태풍과 암흑을 뚫고 내려갔습니다. 수십 미터 바다 밑의 거친 암반이 나올 때까지 수개월 동안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모래와 흙을 굴착해 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절대적인 단단한 암반 위에 거대한 콘크리트 거푸집을 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완공 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강진과 초대형 태풍이 금문교를 덮쳤지만, 다리는 단 1cm의 균열도 없이 단단히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다리의 아름다운 상판 구조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닷속 깊은 곳 눈에 보이지 않는 '암반과의 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는 반석까지 파 내려가는 순종의 과정은 더디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내 욕망을 지우고 말씀의 굴착기로 내 자아를 파내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순종의 기초를 내린 인생은 세파의 어떤 파도와 지진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거룩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장엄한 메시지를 마치시면서 청중들에게 가슴을 울리는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서기기관들과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생명의 권위로 선포된 이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참된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3가지 실천적 적용 전략을 제시하며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비판의 잣대를 버리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오늘부터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타인을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멈추십시오.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일 때마다, "하나님,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비판의 소리 대신 타인을 대접하는 '황금률의 언어'인 격려, 축복, 감사의 말을 먼저 건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넓은 길의 유혹을 물리치고 '매일의 좁은 문'을 선택하십시오.

세상의 편안함과 타협하는 넓은 길을 경계하십시오. 세상의 소리나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 미혹되지 않도록 매일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깊이 읽고, 그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외형적 성과보다 내 삶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정직하게 점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오늘 깨달은 말씀 한 가지를 삶에서 즉시 순종하십시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영적 자만감만 키울 뿐 모래 위 집과 같습니다. 이번 한 주간, 설교를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중 단 한 가지라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십시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용서의 편지를 쓰십시오. 나누어야 할 물질이 있다면 무명의 손길로 구제하십시오. 그 작은 순종 한 걸음이 내 신앙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우는 결정적 암반 뚫기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적 삶의 지혜를 가지고 적용함으로써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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