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 설교본문 | 마8:1-34 |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 설교일 | 2026-10-18 |
20261018 주일오전설교
제목: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본문: 마8:1-34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마태복음 8장과 다음주에 살펴 볼9장은 산 위에서 선포된 메시지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능력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10가지 표적(기적)’의 모음집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단순히 말씀만 잘 전하시는 랍비가 아니라, 온 우주와 만물, 인간의 질병과 영적 세계까지 지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입증하고자 이 사건들을 치밀하게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생들이 등장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나병환자, 이방인이자 로마군대 장교인 백부장, 열병으로 누워 있던 베드로의 장모, 거친 풍랑 속에서 두려워 떨던 제자들, 그리고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려 신음하던 가다라 지방의 두 사람 등을 모두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한계와 절망 앞에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어떤 한계와 고통의 풍랑을 마주하고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며 참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I. 본론
1. 겸손한 믿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 (1~17)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인 1~17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시는 세 가지 사건을 다룹니다.
첫째, 나병환자를 치유한 사건입니다.
목자없는 양같이 방황하던 많은 백성들은 주님께서 전해주신 산상수훈 말씀에 넘치는 감격과 흥분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받은 자들은 이제 산 아래에 있는 사명의 현장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자 나병으로 고통받던 사람이 예수님께 절하며 나왔습니다. 2절에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불치병을 치유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원하시면’이란 말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뜻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겸손한 믿음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일반사람들과의 접근을 금지한 율법을 어기면서도 주님께 다가온 것은 대단한 용기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결과로 간주되어, 정결법상 타인과 접촉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 나병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고 그 치유가 힘들 뿐 아니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죄의 모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면 그 사람도 부정을 타게 됩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만지시면, 부정이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거룩함과 생명이 환자에게 흘러 들어가 그를 깨끗하게 만드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친히 손을 대시고 고쳐주심으로써 희생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을 보여주셨고, 죄를 사하시고 치유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4절을 보면 나병에서 치유받은 사람에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이 나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재검진을 받아야하고 완전히 나았다는 증거로 비둘기와 우슬초를 가져다가 정결예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치유확증을 받으면 그 사람은 마을로 들어갈 수 있고 그를 아무도 내어쫓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마을 안에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순종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는데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둘째,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사건입니다.
이방인 로마군대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할 때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백부장은 종을 친아들처럼 대할 정도로 자상하고 따뜻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부장이 식민지 사람인 예수님을 상관, 즉 주인으로 부르며 고쳐달라고 한 것은 실로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셨을 때 백부장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8절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군대생활을 통해 부하가 상관의 명령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비록 환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마디 말씀만으로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는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방인 백부장의 겸손과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고 하시며 극찬하셨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어떤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이적을 체험할 수 있고 그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고 그 하인을 치유하신 사건은 장차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복음이 확장될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셋째,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들을 다 치유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은 단순한 열병이 아닌 급성전염병으로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나병이나 중풍병이나 열병은 당시 의술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설계하시고 흙으로 빚어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병의 원인까지 정확히 아시고 근본적인 치유를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 치유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17절에서 구약 사53: 4절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인용하여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고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신비주의적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우리의 질병이나 연약함을 실제로 체험하시고 담당하실 뿐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인 죄와 허물까지 없애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불치병을 치료하심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구원자 곧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적임과 동시에 육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과 육은 연약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도 때로는 범죄하기도 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대속하신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호레이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한 성도가 찾아와 "목사님, 저는 제 믿음이 너무 약해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어떻게 해야 제 믿음이 강해질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보나르 목사는 십자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도님, 당신의 시선을 당신의 '믿음의 크기'에 두지 마시고, 당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기'에 두십시오. 구원은 내 믿음의 강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함이 주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병환자도, 백부장도 베드로의 장모도 자신의 자격이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심과 주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겸손한 믿음 위에 치유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제자도와 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8~27)
이어지는 18~2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제자도'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한 서기관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 할 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를 따를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가 부친을 먼저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할 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로 간주되었습니다. 더구나 제5계명에 근거하여 자녀들은 부모의 장례식에 반드시 동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효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는 이론적인 지식이나 도덕적 수련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23~27절, 바다 위에서 일어난 풍랑 사건이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 때 큰 풍랑이 일어나 배가 풍랑으로 뒤집힐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우주의 창조자를 믿지 못하고 다만 눈 앞에서 주무시는 인간 예수만 바라 본 믿음이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뛰어난 선생이 아니라 자연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입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믿음으로 즉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삶의 우선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제자들이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워 하긴 했지만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는 못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개혁의 거센 저항과 목숨의 위협 속에서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의 일입니다. 루터는 종종 낙심하여 서재에 홀로 앉아 있곤 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내 카타리나 보라(Katharina von Bora)가 검은 상복을 입고 서재로 들어왔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왜 상복을 입고 있소?" 그러자 아내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 슬퍼서 상복을 입었습니다."
루터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를 작시하고 종교개혁을 지속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풍랑이라는 '현실의 크기'만 보느라 배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의 크기'를 놓쳤습니다. 제자도란 내 인생의 배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믿으며 어떤 풍랑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와 우선순위의 결단 (28~34)
마지막 단락(28~34절)은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서 일어난 영적 전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린 자 두 사람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무서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칩니다. 29절에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확히 알아봅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의 종말론적 심판의 '때'가 정해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귀신들과 추종자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불 속으로 던져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마귀와 온갖 악령들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성도들을 괴롭히도록 허용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탄의 권세를 멸하고 하나님 나라를 침투시키는 거룩한 침공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고, 2천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로 내달아 바다에 들어가 몰살했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그 고기를 먹거나 사육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불법입니다. 아마도 돼지들의 소유주는 가다라 지방에 사는 이방인들이거나 불경건한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을 지배했던 악령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고 돼지 떼는 바다에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귀신들에게 매여 있던 두 사람은 자유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결말은 충격적입니다. 그 시내의 모든 주민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34).
왜 그랬을까요? 두 사람이 고침받은 영혼의 가치보다, 돼지 2천 마리라는 자신들의 재산적 손실과 물질적 안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구원자를 배척해 버렸습니다. 세상의 물질 때문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돼지보다 더 어리석은 자입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께 나와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영혼도 구원해주시고, 생활도 돌보아 주소서“라고 요청했다면 얼마든지 그 돼지들을 다시 살려주시거나 혹은 새로운 해결책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자기들에게 피해를 주러 온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자기 동네를 떠나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C.S. 루이스의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는 고참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인간을 망가뜨리는 기술을 전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참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설득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그들에게 눈앞의 돈, 물질, 편안함, 당장의 이익이 영혼의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끼게만 만들어라. 세상의 재물과 안락함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면, 그들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다라 주민들이 바로 이 영적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은 기쁨보다 당장의 재산 피해에 마음이 빼앗겨 생명의 주님을 스스로 떠나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습니까?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돼지 2천마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것을 알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8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두 가지 명확한 교훈과 적용 전략이 있습니다.
첫째, 내 삶의 풍랑 속에서 '믿음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인생의 질병, 경제적 위기, 관계의 풍랑을 만날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우리가 죽게 되었다"며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타고 있는 인생의 배에는 바다와 바람을 명하여 잔잔케 하시는 만유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타고 계십니다. 우리의 문제의 크기보다 주님의 능력이 크심을 바라보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문제가 해결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백부장처럼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십시오.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주권과 권위를 선포하는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세상의 가치보다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십시오.
가다라 주민들은 돼지 떼라는 재물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과 편리함 때문에 주님과의 깊은 교통, 예배, 거룩한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리합시다. 물질적 손해나 세상에서의 불이익이 두렵다고 말씀 순종을 미루지 마십시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변의 상처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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