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믿음으로 누리는 참된 안식
2026-06-21 20:26:02
홍기칠
조회수   8
설교본문 히4:1-16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6-06-21

20260621 주일오전설교 : 믿음으로 누리는 참된 안식

본문: 4:1-16

제목: 믿음으로 누리는 참된 안식

 

I. 서론

현대인은 누구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정작 마음의 안식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계는 발전했고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더 불안해졌습니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톱니바퀴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좋은 직장, 안정된 노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위해 쉼 없이 달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참된 평안이 아니라 깊은 피로감과 영적인 갈증뿐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인간이 단순히 육체적 피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참된 안식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육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침묵의 상태가 아닙니다.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이자 구원의 완성입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의 비밀을 깨닫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II. 본론

1. 약속된 안식은 '믿음의 결합'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1-5)

본문에서 말하는 안식은 창조의 안식, 가나안의 안식, 종말론적 안식세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안식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는데 이는 피곤함 때문이 아니라 완성과 만족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안식이란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평화와 안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거기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론적 안식이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영원히 누리는 참된 안식을 말합니다. 신약성도들은 영적인 가나안 즉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게 됩니다. 신학자 칼빈은 성도의 전 생애는 안식을 향한 순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안식을 맛보지만 아직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광야에서 쓰러졌던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보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약속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2절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결부시킨다'는 단어는 '서로 다른 두 물질이 화학적으로 완전히 융합되어 하나가 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려올 때, 그것이 내 삶의 고백인 '믿음'과 완전히 뒤섞여 녹아내려야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만나를 먹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낙담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정보로만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들었지만, 정작 거인과 같은 아낙 자손들을 보았을 때 그 말씀은 그들의 믿음과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습니다. 3:19절에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믿음이 섞이지 않은 말씀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예배 자리에 앉아 수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그 말씀이 내 삶의 연약함과 두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맛볼 수 없습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유명한 외줄 타기 장인이었던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의 일화입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 양 끝에 줄을 매달고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 위를 건너는 묘기를 선보였습니다. 수많은 관중이 숨을 죽이며 그의 걸음을 지켜보았고, 그가 무사히 건너자 폭발적인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블론딘은 관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이 외줄 위에 사람을 외바퀴 수레에 태우고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관중들은 그의 엄청난 실력을 방금 보았기에 일제히 외쳤습니다. "! 믿습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자 블론딘이 빙그레 웃으며 한 관중을 가리켰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수레에 타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순간, 열광하던 관중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수레에 타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은 관람객의 믿음, 즉 지식적인 동의에 불과했습니다. 내 생명을 그 수레에 맡기는 진짜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평안을 주신다"라는 명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지식적 동의입니다. 참된 안식은 내 삶의 위기와 염려 속에서 나 자신을 하나님의 수레에 온전히 던져 태우는 '믿음의 결합'이 있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는 안식을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염려보다 약속을 붙드십시오. 환경보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십시오.

2.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11-13)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말씀과 믿음을 온전히 결합하여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의 의심과 불신앙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일을 행하는 유일한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말씀의 능력을 가장 선명하게 묘사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을 네가지로 설명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박물관에 박제된 죽은 문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Energes)' 에너지라고 선언합니다. 성령 안에서 지금도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이 말씀이 없는 자는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활력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 여기서 혼은 육적 생명의 중심이고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고의 부분이고 관절과 골수는 몸 가운데서 갈라놓기 가장 힘든 근본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이러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의사의 날카로운 수술 메스와 같아서,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숨겨진 죄의 종양, 위선, 자아, 의심을 정확하게 찔러 쪼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과의사의 메스는 환자를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닙니다. 아픈 부위를 도려내어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수술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생명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탐욕을 드러내고 죄를 찔러 아프게 하지만 결국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동기를 드러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말씀 없는 신앙은 감정주의가 되기 쉽고, 성령 없는 말씀은 형식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성령과 말씀은 함께 역사합니다. 그 말씀이 지금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할 뿐 아니라 장차 우리 인생을 결산할 최후심판 날에는 그 모든 생각과 뜻이 하나도 숨김없이 다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꾸만 무언가를 감추고 포장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척, 믿음이 좋은 척, 아무 문제가 없는 척 영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니 영혼이 지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부딪혀 올 때, 우리의 위선과 생각의 실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의 메스 앞에 나를 온전히 내맡기고, 내 죄성과 연약함을 직면할 때 비로소 영혼의 치유와 참된 회복의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해야만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님이 어느 주일, 설교 도중에 성령의 강한 감동을 따라 청중석의 한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지금 주머니 속에 훔친 물건을 숨겨두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당장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예배가 끝난 후, 한 청년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목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값비싼 은시계를 꺼내어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늘 아침 고용주로부터 이 시계를 훔쳐서 주머니에 넣고 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가리키며 말씀하실 때, 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제 모든 범죄를 보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 청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 그가 시계를 훔쳤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의 예리한 검을 통해 그 청년의 은밀한 죄를 찔러 쪼개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드러내신 것입니다. 청년은 죄를 자백하고 시계를 돌려주었으며, 평생을 짓누르던 죄책감에서 벗어나 비로소 참된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말씀 앞에 드러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안식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수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단순히 지식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주님, 이 말씀이 내 삶의 어느 부분을 고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기도하십시오. 매일 말씀 묵상을 습관화하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 회개의 자세로 들으십시오. 말씀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내어놓으십시오.

 

3.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14-16)

말씀의 검 앞에 우리의 죄와 허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더러운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절망에 버려두지 않고, 곧바로 소망의 복음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15-16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무서운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대제사장조차도 1년에 단 한 번, 짐승의 피를 가지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들어가야 했던 곳이 지성소의 법궤, 즉 시은좌였습니다. 만약 죄가 남아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그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갈라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중보자이셨습니다. 이제 그 보좌는 두려운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정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멀리서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이 아닙니다. '그 고통의 자리를 직접 경험하고, 그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겪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세상살이에 지쳐 눈물 흘릴 때 주님은 "내가 네 아픔을 안다, 내가 네 무거운 짐을 안다" 하시며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나의 자격이 아니라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뻔뻔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도, 실패할 때도,낙심할 때도, 은혜의 보좌는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긍휼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한 마을에 작은 애완동물 가게 주인은 문 앞에 '강아지 팝니다'라는 안내판을 걸어두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어린 소년이 그 간판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인이 휘파람을 불자, 어미 개와 함께 귀여운 강아지 다섯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뒷다리를 심하게 절며 맨 뒤에서 뒤처져 기어 오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눈이 그 다리 저는 강아지에게 머물렀습니다. "아저씨, 저는 이 강아지를 사고 싶어요." 가게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그 강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고관절이 잘못되어서 평생 다리를 절 수밖에 없단다. 네가 돈을 주고 사기엔 아까운 가치가 없는 개야. 정 원한다면 그냥 공짜로 주마." 그러자 소년은 정색하며 주머니의 동전을 주인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아니요, 공짜로는 안 받아요. 이 강아지도 다른 강아지들과 똑같이 가치 있는 강아지예요. 제값을 다 낼게요." 그러면서 소년은 자신의 바지 밑단을 위로 올렸습니다. 소년의 왼쪽 다리에는 두꺼운 철로 된 교정용 보조기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소년은 주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도 다리를 잘 못 걸어요. 그래서 저 강아지의 마음을 잘 알아요. 저 강아지에게는 자기를 이해해 줄 친구가 필요해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체휼'이자 '동정'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을 동정하시는 이유는, 주님 자신이 몸소 인간의 몸을 입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 상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어떤 연약함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했다고 하나님을 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III. 적용 및 실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참된 안식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누리지 못했던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문제가 하나도 없는 환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친 풍랑 한가운데서도 나를 품으시는 주님으로 인해 내 영혼이 고요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이 안식을 실제적으로 누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공급받기 위한 구체적인 세 가지 실천 전략을 나누며 도전을 드립니다.

첫째, '말씀 고백과 기도의 결합'을 실천하십시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5분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펴서 소리 내어 읽고, "주님, 내가 이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걷겠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기도는 내 생각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믿음으로 용해시키는 과정입니다.

둘째, 매일 밤 '말씀의 거울 앞에 내 영혼을 비춰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루를 마무리하는 조용한 시간에 오늘 본문 12절을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오늘 제가 누군가를 미워했습니다. 제 안에 시기와 욕심이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말씀의 검 앞에 나의 연약함과 죄를 정직하게 고백할 때, 죄책감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영혼의 참된 안식과 자유함이 밀려올 것입니다.

셋째, 위기의 순간마다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삶의 갑작스러운 폭풍을 만나거나,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절망할 때,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너 같은 게 무슨 그리스도인이냐?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겠냐?" 이러한 정죄의 음성에 속지 마십시오. 그 순간이 바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다리 저는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시고 안아주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달려가십시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피로와 염려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우리를 동정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참된 안식을 풍성히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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