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 설교본문 | 골3:1-17 |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 설교일 | 2026-06-24 |
20260624 수요설교
본문:골3:1-17
제목: 위의 것을 찾으라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치열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변화의 증거는 내 삶의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땅의 것을 요구합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지위, 더 짜릿한 쾌락, 그리고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무한 경쟁의 압박이 매일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끊임없이 “네 눈에 보이는 것, 네 손에 잡히는 것만이 진짜다. 그러니 땅을 보고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선포합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세속적인 철학, 신비주의적 천사 숭배, 그리고 엄격한 금욕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침투해 성도들의 신앙을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억제하고 경건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서 2장 마지막 절에서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이런 것들은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종교적 고행으로는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3장에 들어서며 거룩함의 비밀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고행’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임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언적 진리로 시작하여 실천적 명령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바울 신학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의 핵심인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긴장 속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가 어떻게 위의 것을 찾으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 깊이 있게 묵상하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 (1~4절)
바울은 성도의 삶의 변화가 단순한 행동의 교정이 아니라, ‘시선의 혁명’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찾으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으로 열망하고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라’는 말 역시 ‘마음의 방향을 고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하늘에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새로운 영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것들이란 곧 하나님 나라와 그 의, 하늘의 상, 하늘의 시민권, 하늘의 유업, 하늘의 영광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 합당한 근거가 1절 후반부와 3절에 제시됩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측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등장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죄에 대해 함께 죽었고, 그분이 부활하실 때 새 생명으로 함께 살아난 존재입니다. 이것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사건입니다. 헬라어 시제를 보면 ‘죽었고’,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라는 단어는 모두 단회적 과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법적으로, 영적으로 완료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짜 새생명은 이제 이 땅의 정욕이나 세상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보물처럼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본질이 영원하고 안전한 대재판장 되신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절의 약속처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최후 재림의 영광의 날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힌 바 된 자들임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어느 사냥꾼이 깊은 산 속에서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와 닭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알에서 깨어난 새끼 독수리는 자신이 병아리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닭들과 함께 마당의 흙을 파헤치며 벌레를 잡아먹고, 날개가 있어도 고작 담장 위나 파닥거리며 올라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독수리는 하늘 높이 거대한 날개를 펴고 폭풍우를 뚫고 유유히 날아가는 멋진 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 독수리가 늙은 암탉에게 물었습니다. “저 멋진 새는 이름이 뭐야?” 암탉이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꿈도 꾸지 마라. 저 새는 새들의 왕인 독수리야. 우리는 땅에서 태어난 닭이란다.” 이 말을 들은 독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평생 하늘을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채 닭처럼 살다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독수리의 모습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늘의 보좌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닭장에 갇힌 독수리처럼 땅의 염려와 정욕, 세상의 평판이라는 모이를 쪼아먹는 데 온 정신을 빼앗겨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땅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제 시선을 들어 하나님 보좌가 있는 저 높은 하늘나라, 위의 것을 바라보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단절의 혁명: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5~11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구체적인 삶의 첫 단계는 ‘단절의 혁명’입니다. 본문 5절은 강력한 어조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죽이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숨통을 끊어버리라'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죄와의 타협이나 점진적인 개선이 아니라, 완전한 결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죽여야 할 땅의 지체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역인 성적 타락과 정욕과 탐심입니다.
본문 5절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와 동의어로 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심은 ‘더 많이 가지려는 끝없는 갈망’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내 삶의 만족과 안전을 삼으려는 태도,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단호하게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탐욕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분명히 임하게 될 것임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언어적, 관계적 죄악들입니다
본문8-9절에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 죄들은 모두 입술과 감정을 통해 이웃을 해치는 평화의 파괴자들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죄악을 청산해야 하는 이유를 ‘옷을 벗고 입는 행위’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9절 후반부와 10절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이미 죄에 오염된 아담의 계열인 ‘옛 사람’의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열인 ‘새 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미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군인이 민간인 옷을 벗고 군복을 입었으면 군인답게 행동해야 하듯, 새 사람이 된 성도는 옛 사람의 더러운 죄의 습관들을 단호하게 집어던져야 합니다. 이 새 사람은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이며,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11절 말씀처럼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주변에 살던 최하의 야만인들입니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 새로운 초문화적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옛 주인이었던 사탄이 정욕과 탐심으로 유혹하면, 그 유혹에 넘어가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죄의 종노릇을 하곤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옛 사람의 더러운 옷을 입고 살지 마시고, 땅의 지체를 단호히 죽이시기 바랍니다.
3. 연합의 혁명: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고 평강과 말씀이 다스리게 하라 (12~17절).
우리는 이제 죄를 죽이고 벗어버리는 소극적 단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제 적극적으로 거룩한 성품을 채워 넣는 ‘연합의 혁명’을 명합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고 선언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도를 향해 엄청난 호칭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 라는 호칭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쓰이던 특권적 호칭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놀라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분에 걸맞은 다섯 가지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바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자, 타인을 대하는 관계적 미덕들입니다.
더 나아가 13절과 14절은 공동체 안에서 이 성품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상처가 있고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공동체는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무한한 용서’를 기준 삼아 서로를 용납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미덕이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주는 최종적인 띠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율법의 완성이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이며 신앙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새 사람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세 가지 핵심적인 내적 동력을 제시합니다.
첫째, 1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주장하게 하라’는 말은 심판이 경기 규칙에 따라 판정을 내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마음에 갈등과 염려가 찾아올 때,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 마음의 최종 심판관이 되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둘째, 16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의 주도권을 잡을 때, 우리는 지혜로 서로를 권면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과 생각 속에 언제나 풍성히 머물면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모든 결단을 주관하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15-17절 말씀처럼 모든 일에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바울은 매 구절마다 ‘감사’를 반복합니다. 감사는 성도의 영적 건강을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척도입니다.
결론적으로 17절은 성도 삶의 대원칙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고 했습니다. 내 이름, 내 영광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와 이름으로 행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바로 새 사람의 삶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향악단이라 할지라도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조율(Tuning)’입니다. 수십 개의 악기가 제각각 자기가 내고 싶은 소리를 내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됩니다. 그래서 오보에가 기준음인 ‘라(A)’ 음을 길게 불어주면, 바이올린도, 첼로도, 플루트도 모든 악기가 그 하나의 기준음에 자신의 현과 관을 맞춥니다. 모든 악기가 하나의 기준음에 철저히 조율될 때, 비로소 거장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전율이 돋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 때, 각자의 목소리만 높이면 상처와 갈등이라는 소음만 발생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기준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우리 자신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고, 그분의 말씀에 우리 생각을 맞추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교향곡이 될 줄 믿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로새서 3장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그에 따른 삶의 도덕적, 관계적 혁명이 무엇인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늘 이 예배당 문을 나설 때 그저 좋은 종교적 강의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땅의 지체에 짓눌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기 위한 세 가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첫째, '아침의 5분'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시선을 조율합시다.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보며 세상의 뉴스, 주식 정보, SNS의 타인의 삶을 확인하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것을 생각하는’ 구체적인 습관입니다. 내일부터 일주간, 눈을 뜨면 스마트폰을 켜기 전 단 5분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오늘 본문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 하지말라”는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다. 오늘 내 시선을 주님께 고정한다.” 이 선포로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의 시선은 땅이 아닌 위를 향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내 안의 우상 목록'을 작성하고 죄를 끊어냅시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 이번 주간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그것이 없으면 불안해하며, 더 가지려고 끝없이 욕심내는 ‘나만의 탐심의 영역’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해 보십시오.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의 성공입니까? 혹은 중독적인 쾌락입니까? 내 안의 우상들을 기도의 골방에서 명확히 이름 불러가며 “이 땅의 지체를 예수의 이름으로 죽이노라” 고 선포하고, 죄의 기회가 되는 환경을 단호히 차단하십시오.
셋째, 매일 세 번 '의도적인 감사'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언어에서 분함과 비방, 거짓말을 벗어버리기 위해, 매일 밤 잠들기 전 하루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 제목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노트에 적거나 가족들과 나누십시오. 그리고 누군가에게 불만이 생기거나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내 감정대로 말을 내뱉기 전에 잠시 멈추고 17절 “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지금 하려는 이 말이 과연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말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이 하려는 말의 필터가 될 때, 우리의 입술에서는 부끄러운 말이 사라지고 긍휼과 사랑의 언어가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닭장 속에 갇힌 독수리처럼 땅만 보며 신음하지 마십시오. 옛 사람의 낡고 냄새나는 옷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으십시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걸어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위의 것을 찾으며, 그리스도의 평강과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와 우리 교회를 지배하게 하는,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한 새 사람의 승리를 가득 안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
|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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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 바울의 증언과 주님의 보호 | 행23:1-35 | 2026-02-25 | 홍기칠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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